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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백창원
교차로에 서서

백창원 2019-02-18 15:53:56 118

 

여명은 가장 높은 하늘을 먼저 비추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찬란한 빛놀이도 잠시, 코페르니쿠스의 언명에 따라 태양의 입사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어느새 띄엄띄엄 서 있는 높은 건물 귀에 햇살이 걸리는가 싶더니 점차 어깨, 허리를 드러내고 마침내 무릎 아래 담벼락을 따라 골목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든다.

 

문득 올라오는 공복감으로 손목 위를 쳐다봤다. 

두 시간 째 호이안 올드타운을 걷고 있음과 조금 전 8000보를 찍었다는 정보가 스마트워치 LED스크린에 표시되었다.


그러고보니 동트기 전 호텔을 나선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허기와 피로감은 족쇄와 사슬이 되어 질질 끌리기 시작하고 발걸음은 느려진다. 잠시 간의 정거장이 필요한 시점이다.

 

나는 무뎌진 열정을 충전하기 위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38컷을 완수한 수퍼리아 400을 구출하고 포트라 400 필름을 로딩했다.

 

 

 

 

 

 

의식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포토제닉한 페인트공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흰 모자 쪽이 등 뒤에서 조언을 하는 듯 했다. 

포트라의 첫 셔터가 열렸다 닫힌 순간이다. 

 

 

 

 

 

 

 

 

 

 

 

작업 중인 페인트공을 지나 교차로의 한 꼭지점을 물고 섰다. 

머스타드 빛 담벼락과 코랄 블루의 창문은 남국의 정취를 한껏 고양시켰다. 

나는 이곳을 정거장 삼아 잠시 머물러야만 할 것 같은 강한 당위를 느꼈다.

 

 

여행 뒤에 찾아본 바에 따르면,
이 교차로는 Le Loi 스트리트와 Phan chu trinh 스트리트가 가로지르는 곳으로서 레 러이와 판 추 트린이라는 도로명은 각각 베트남의 역사적 인물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었다. (구글지도: 15°52'42.4"N 108°19'43.0"E)


레 러이는 후 레(Hậu Lê: 1428 ~ 1788)왕조의 태조로서
명나라 군을 물리치기 위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도 끝까지 명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새 왕조를 건설한 영웅이었고,
판 추 트린은 20세기 초 프랑스 식민시절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관광지 특유의 야행성 피로로 한산한 올드타운을 조금 벗어난 이곳은 분주한 베트남의 일상이 라이브로 펼쳐지고 있었다. 

교차로는 수많은 바이크와 자전거 그리고 행인이 뒤섞여 정신 없는 혼잡함 그 자체였고
아슬아슬한 순간을 목격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낯선 여행자의 기우였을 뿐이었다. 
 

 

 

 

 

 

이방인의 눈에는 온전한 카오스지만 분명 그 안에는 암묵의 룰이 있고 소통이 존재한다. 

동서남북 제 갈 길이 엇갈리지만 교차로에 들어서면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고 크락션으로 진행의사를 전달한다. 


공격과 경고의 경적이 아니라 소통과 양보의 인사로서 상호 교환된다. 

사거리는 변변한 신호등 하나 없어도 물 흐르듯 그렇게 효율적이다. 

 


카오스적 질서다.

 

 

 

 

 

내가 선점(?)하고 있던 스트리트 스냅의 황금어장에 우람한 디지털일안반사식 카메라를 앞세운 한 무리가 진입했다. 

다름 아닌 웨딩스냅 팀이었는데, 현지 포토그래퍼에게도 이 교차로는 포인트였나보다. 

 

 

 

 

 

길 건너 커플의 포즈를 조율하고 좋은 표정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바이크, 자전거, 행인이 지나지 않는 순간을 골라 촬영해야 하는 촬영팀의 노고가 곁에서 보기에도 결코 녹록치 않아 보였다.  


출근길 러시아워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 부드러운 빛을 쫓아 온 촬영팀의 프로페셔널한 열정과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아까의 페인트공은 교차로를 물고 이루어지는 분주한 웨딩스냅에도 아랑곳 않고 홀로 작업에 열중이셨다. 

군데군데 일어난 페인트와 벽에 붙은 이끼를 빗자루로 쓸어낸 후 겨자색 페인트를 적신 롤러로 벽면을 메워나가는 작업이었다.   

 


새로운 색을 칠하기 위해서는 낡은 페인트를 긁어내야 한다.   

그래야 깔끔하고 균일하게 새로운 페인트를 안착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바쁜 일상이 교차하는 사거리 한 켠에 서 있노라면,
끊임없이 들고나는 파도 가운데 묵직한 바위 마냥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간다. 


켜켜로 쌓인 시간의 층위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품는다. 

 

만약 여행자가 일상적 거리에 장노출되면 어느 순간 현지인과의 경계가 옅어지고 마침내 교차로는 하나의 완연한 세계로 거듭나게 된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감관을 총동원하여 이 공간이 발산하는 모든 감정을 느끼는 일만이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러시아워도 이제는 풀린 모양이다. 

그렇게 정신없던 교차로는 숨을 고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따스한 햇살을 너그럽게 머금었다.

 

“과일 바구니를 든 여인”을 마지막으로 교차로를 벗어났고,
나는 다시 여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마지막 사진은 그렇게 가장 포트라다운 색감으로 여행자의 앨범에 남게 되었다. 

 

 

 

 


Leica m6, summicron-m 50mm f2 3rd, kodak portra 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