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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Starless
슬픔이 없는 십오초

Starless 2019-07-15 11:47:18 284

 

미얀마에 다녀온 이틀 뒤, 가까운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있었다.
 

멀리 다녀왔으니 한 잔 해야지, 어디 보자, 살이 많이 빠졌네, 좀 더 먹어야겠네, 미얀마는 어땠어? 정말 좋았습니다, 다들 꼭 가보셔야 합니다.

행복했던 기억들, 잊기 어려운 장면들을 얘기하며 잔뜩 들떴나보다. 술을 제법 마시고 돌아와 꽤나 늦게 잠이 들었다.

새벽녘, 막내고모의 전화를 받았다. 어쩌면, 전화 벨소리를 듣고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수화기 너머로 막내고모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놀라기보다는, 무너져가는 마음 한자락을 수습하려 애썼었던 것 같다.

일생을 자식들에게 헌신하신, 평생 손자를 너무도 사랑하신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미얀마에 다녀온지 겨우 3일 후였다.

할머니께 드리려고 모셔온 부처상은 결국 보여드리지 못한채 영정 앞에 놓였다.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상을 치르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처리하다보니 어느새 겨울이 성큼 다가와있었다. 어느 출근길, 무심코 틀어둔 팟캐스트에서, 김영하씨가 시를 읽어줬다. 성대 뒷길을 따라 감사원으로 접어들던 때였나보다.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15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차를 잠길가에 세우고 감정을 추스리려 애썼었던 것 같다. 반복해서 듣고 다시 들었던 것 같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차를 몰 수 있었다.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 지 몰랐던 간절한 순간들을 지나, 미얀마는 영원히 기억될 시간으로 남게 되었다.

2018년 가을을 기억하며, 이 글을 할머니께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