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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Starless
양곤순환열차

Starless 2019-05-13 17:53:29 255

꽤나 피곤했다.

편안한 여정일거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두 번의 심야버스에 잠도 거의 못자며 일주일을 돌아다니다보니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양곤에서의 마지막 날은 조금 쉬면서 보내자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 네시 반이었다. 고작 세시간도 못잤는데 이 무슨... 잠이 깬 건 억울했지만, 역시 가봐야 하나, 아니 피곤한데 그냥 이대로 뭉갤까, 안가면 후회하겠지, 다시는 못올 수도 있잖아, 짧은 고민을 마치고 억지로 일어났다. 피로는 하나도 풀리지 않았지만, 몸을 움직일 기운 정도는 있었다. 카메라를 챙겨 택시를 불렀다. 양곤중앙역으로 가주세요. 구글링으로 발견한 시간표를 확인하며 여섯시 십분 출발하는 양곤순환열차를 타러 갔다. 

 

 

 

 

 

 

 

 

 

 

 

 

 

 

 

 

 

 

 

 

두번째 양곤역이었다. 헤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벽에 붙은 노선도를 보며, 닭대가리, 대체 저 그림을 왜 못본거냐, 머리를 쥐어뜯으며 육교를 건너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조도 낮은 전등이 켜진 창구에서 표를 샀다. 우리돈 150원. 양곤순환열차 1장이요. 창구 직원은 시계를 흘깃 보더니, 일곱시 사십오분 기차네요. 이따 다시오세요. 담담하게 얘기했다. 헐? 시계를 보니 두시간이나 남아있었다. 허허허. 어찌 이런 일이. 내가 허허허, 웃자 창구 직원도 허허허, 웃으며 뒤를 가리켰다. 저 뒤에 의자가 있군요.

단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구나, 허탈해서 의자에 앉아있다가, 그래 역 구경이나 좀 하자, 언제 또 차근차근 보겠나 싶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플랫폼에서 양치하는 사람도 구경하고, 열차에서 뛰어내려 철로를 점령하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떠나보내는 사람, 돌아온 사람도 구경하고 플랫폼 제일 끝에 자리한 화장실도 구경했다. (사용해보지는 않았다.) 기차의 종류가 정말 다양했는데, 일본에서 온 기차가 많은 것 같았고, 우리 기차도 보였다. 저건 통일호네.

 

 

 

 

 

 

 

 

 

 

 

 

 

 

 

 

 

 

 

 

 

 

 

 

 

 

 

 

 

 

 

 

 

 

 

 

 

 

 

 

 

 

 

 

 

 

 

 

 

 

 

 

 

 

 

 

 

 

 

 

 

 

 

 

 

 

 

 

 

 

 

 

 

 

 

 

 

 

 

 

정신 없이 구경하다보니 열차시간이 됐다. 다시 창구로 찾아가니 아까 그 직원이 싱긋 웃으며 표를 내줬다. 그러면서 자기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뒤에 와있죠? 저겁니다. 손가락을 따라 멀리 바라보니 JR이었다. 와, 이게 양곤순환열차였구나, 지난번에 왔을때 플랫폼을 떠나던 그 열차였다. 난 대체 왜 JR과 기차를 헷갈린거지? 역시 닭대가리인가? 딱 봐도 이건 전철이고 교외선은 기차였잖아. 한숨을 쉬고 열차에 오르려고 보니 제법 높았다. 플랫폼과 바닥의 높이를 맞추지 않다보니 상당한 높이의 전철에 사람들이 (말 그대로) 기어올랐다. 신기한 장면이었다. 

 

 

 

 

 

 

 

 

 

 

 

 

 

 

 

 

 

 

 

 

 

 

 

 

 

 

 

 

 

 

 

 

 

 

 

 

 

 

 

 

 

 

 

 

 

 

 

 

 

 

 

 

 

 

 

 

간신히 탑승에 성공하고 나니 긴장이 풀렸는지 슬금슬금 졸음이 왔다. 어쩐지 무료하네, 잠시 졸다가 눈을 뜨니 열차는 시장으로 변해있었다. 수많은 노점상들이 역마다 기차를 오르내리며 장사를 했다.

세번째 역에서 빵장수 아주머니께 크림빵을 샀다. 달콤한 크림에 뭔가 소금이 들어간 신기한 맛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강력한 포스를 풍기는 노란 옷의 젊은 여성이 머리에는 쟁반, 손목에는 목욕탕의자를 끼고 나타났다. 객실 한쪽에 목욕탕의자를 내려놓더니 아예 국수집을 차렸다. 헐. 내가 입을 못다물고 쳐다보니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씨익 웃었다. 저 국수는 먹어야 돼, 안먹으면 말이 안돼, 홀린듯 다가가 국수를 달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말이 잘 안통했다. 그냥 국수를 달라고 한건데 뭔가 복잡한 사연이라도 전해진건가. 둘이 어버버하고 있으니 나를 보며 웃은 아주머니가 다가와 미얀마어로 통역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충 이런거다. 젊은 여성이 미얀마어로 얘기를 하면, 아주머니가 미얀마어로 나한테 얘기하고, 그럼 난 영어로 아주머니한테 얘기하고, 아주머니는 다시 미얀마어로 젊은 여성에게 얘기를 전해줬다. 아주머니는 영어를 전혀 못하는 것 같았고 나는 미얀마어를 1도 모르는데 어쩐지 대화가 됐다. 무사히 국수 주문도 마치고 돈도 내고 국수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국수가 무척 맛있어서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으니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도 씨익 웃어줬다.

 

 

 

 

 

다음 역에서는 온갖 농산물을 짊어진 상인들이 잔뜩 올라탔다. 옥수수와 감자, 호박이 가득 든 푸대로 열차가 채워졌다. 한 아주머니는 아예 내 옆에 감자  푸대를 내려놓더니 나한테 붙잡고 있으라고 미션을 주셨다. 네, 그럼요, 제가 또 감자 푸대를 붙잡고 있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내가 오른팔로 감자 푸대를 껴안고 있으니 사람들이 우하하 웃었다. 유쾌한 분들이네,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드디어 가치담배 상인이 열차에 올랐다. 분명히 금연이라고 써있기는 한데, 그러던 말던 담배 상인은 불을 붙여줬다. 젊은이는 문앞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열차 안으로 느릿느릿 담배 연기가 돌아다녔다. 담배 연기 사이로 노스님이 탁발을 했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셔서 얼떨결에 합장을 했다. 담배 연기와 함께, 나른하고 향긋한 순간이었다.

 

 

 

 

 

세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열차는 양곤역으로 돌아왔다. 아, 내리지 말까, 그냥 이대로 두어바퀴 더 돌까, 잠깐 고민하는데 문앞에 앉은 모녀가 보였다. 짐이 제법 많아 보였다. 아이 엄마와 눈을 마주치고 짐을 들었다. 고맙습니다, 아이엄마가 활짝 웃었다.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고 플랫폼으로 내려섰다.

 

 

 

 

 

 

 

 

 

 

 

 

 

 

 

 

 

열차가 떠난 뒤에도 아쉬워 플랫폼을 서성였다. 언젠가 돌아올 수 있겠지, 그날은 하루 종일 타야겠다. 

 

 

 

 

 

 

 

 

 

 

 

오후 일정을 보내기 위해 양곤중앙역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