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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백창원
영일만

백창원 2019-05-03 16:05:53 122

leica m6, summicron 35mm f2, ilford hp5+

 

주말 아침, 도구(都丘)에 서서 영일만 바다를 바라본다.
이불의 포근한 유혹을 과감히 뿌리친 것은 결국 잘한 일이었다.

며칠 전, 김훈 작가의 영일만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영일만에서 늘 새로운 빛과 시간으로 충만한 생명의 바다를 보았다고 했다. 
나는 그가 말한 영일만의 인상을 눈 앞에 펼쳐진 풍광에다 슬며시 포개어 보았다.
그러자 마법과도 같이 깊숙히 숨겨진 영일만의 텍스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해는 빛이고 일월은 곧 시간이다.
태초로부터 영일만은 너른 가슴으로 200제곱킬로미터의 바다를 끌어안은 채 윤번하는 해를 부지런하게 맞이해왔다.

2000년 전 연오와 세오는 바로 눈 앞에 놓인 이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갔고, 신라의 해와 달은 빛을 잃어버렸다.
이에 놀란 아달라 왕은 신관의 조언에 따라 세오가 짠 비단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렸고 비로소 일월은 빛을 다시 찾았다고 한다. 
당시 제사에 쓰인 세오의 비단은 창고에 모셔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라 하였으며,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도기야(都祈野)라 칭하였다. ‘도기야’는 현재 ‘도구’라는 지역을 일컫는데, 일제때 지명이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도구를 시작으로 임곡, 발산, 대보까지 이어진 굽은 도로를 따라 청룡회관에 즈음하면, 포철이 들어선 어릿불(옛지명)을 조망할 수 있다. 
대나무처럼 솟아난 굴뚝은 지금도 끊임없이 연기를 토하며 철을 정련하고 강을 조형한다.
제철보국의 정신으로 무장한 채 포항제철은 조국 근대화에 앞장섰고, 우리는 메이드 인 코리아의 철로 자동차를 만들고 배를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21세기에 ‘조국 근대화’가 주는 언어의 원근감은 청룡회관과 포철 사이 바다의 거리만큼이나 아득하다.
짙은 아득함으로 인해 나의 시선은 결국 철의 섬에 다다르지 못하고 어미의 양수 같은 근원의 바다로 낙하하고 만다.

태초 이래 바다는 원형질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채 들고 나기를 반복했을 것이다.
나는 그 앞에서 인간의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백만 년 단위로 표시된 다윈의 스케일로 작동하는 자연에 비하면, 인간의 시간은 찰나적일 뿐이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며 GD는 필멸자의 운명을 노래하지만,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욕망하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여기 영일만에 유장하게 흐르는 일월신화를 보면 필멸자의 운명을 그리 낙담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태양의 온도만큼 극렬한 쇳물은 연오의 손길과 같은 연주공정을 거쳐 길게 늘어지고, 세오의 숨결이 스민 압출공정을 통해 철선의 형태로 가늘게 뽑힌다. 
이렇듯 연오(延烏)와 세오(細烏)가 남긴 유산은 지금도 포항제철에서 유형의 실체를 갖고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어느새 동녘 해가 높다. 
아달라왕이 제를 올렸다던 일월동을 지나 되찾은 빛이 한가운데 비친 곳이라는 중명리를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과연 포항은 전설의 땅이자 신화의 고장이다.

전설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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